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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이야기/음악이야기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by 동강사랑💙 2011. 1. 11.


Clementine

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Dwelt a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ne

1849년 어떤 계곡의 동굴에서
금맥을 찾아 헤매이던
어느 광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고 있었죠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 Clementine

오~ 내 사랑 오~내 사랑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네가 영원히 내곁을 떠나갔기에
가슴이 미어질듯 아프단다

Drove the ducklings to the water
Every morning just at nine
Hit her foot against a splinter
Fell into the foaming brine

그애는 매일 아침 9시만되면
오리떼를 몰고 물가로 나가곤 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거센 물결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지요

In my dreams, she still doth haunt me
Broken garments soaked in brine
Though in life I used to hug her
Now she's dead I draw the line
How I missed her, how I missed her
How I missed my Clementine
Then I kissed her little sister
And forgot my Clementine

꿈속에 그애는 여전히
물에젖고 찢긴 옷을 입고 나타나곤 했었죠
그애가 살아있었을 때는 자주 안아주곤 했었지만
그애가 죽은 이제는 선을 그어야만 했지요

내 사랑 클레멘타인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 후 그애의 어린 여동생에게 키스하고 난 후에야
내 클레멘타인을 잊을 수가 있었죠


원래, Clementein은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포티-나이너(forty-niner)"들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불렀던 노래였다. 노래에 나오는 "포티나이너"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황금을 캐기위해 캘리포니아의 광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말한다.

184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의 어느 제재소에서 일하던 목수에 의하여 시작된 골드러시는 당시 미국 사회를 열병으로 끓어 오르게 하였다. 각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서 북부 아메리카의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직장을 팽개치고 노다지를 캐기위해 광산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공무원도 있었고 신문기자도 있었으며, 군인, 의사, 판사 등 상류층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공장과 사무실은 휴업을 하고, 선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선원들을 구하지 못해 선주들은 배의 운항을 중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인뿐만아니라 유럽, 남미, 중국 등 외국에서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광부가 되어 1848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어치의 금을 캘리포니아의 광산에서 캐냈다.
물론 당시로서는 아주 큰 돈이었지만 "포티나이너"들 모두가 거부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포티나이너"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가혹한 노동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거친 노동과 부실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와 인디언의 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힘들게 일을하고 집에 들어가면 숭숭 구멍뚫린 지붕에선 비가 새고 편안히 쉬어야 할 방안에는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가 일쑤였고, 옷은 제대로 입을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피땀 흘려 캐낸 황금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등 돈많은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허탈감에 사로잡힌 "포티나이너"들 사이에서는 자조적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굴과 계곡에서 금맥을 찾는 한 포티나이너에겐 클레멘타인이라는 딸이 있었지..... "

이렇게 시작하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는 "포티나이너"들의 슬픔과 눈물이 담긴 상실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3.1운동 직후부터라고 한다. 소설가 박태원씨에 의해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사가 바뀐 이 애조 띤 노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고 있던 우리 민중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