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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이야기/음악이야기

그리워 그리워 - 오페라 춘향전

by 동강사랑💙 2011. 1. 19.

그리워 그리워 - 오페라 춘향전
 
- 이서구 시, 현제명 곡 -

그리워 그리워 사랑 그리워
해 지고 밤 되면 별을 헤면서

돌아올 이 날을 기다렸나니
꿈 같이 님 만나 마음 설레요

천리 길이 멀다 하였소
물 건너 산 넘어 한양인데

그리운 님 보러 내 왔느니라
이 마음 그대로 있나이다

사랑 사랑 우리 사랑
잘 되어도 우리 사랑

못 되어도 우리 사랑
봄이 되어 꽃이 피고서

밤이 되어서 달 뜨면
님을 그려보나니

위대하다 우리 사랑
산과 같을까 바다와 같을까

사랑 사랑 우리 사랑

서방님 내일은 내가 죽는날이요
시체나 찾아 묻어주시오

어머니 오늘밤에라도
새옷 드리고 진지대접 잘하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오
부디 경솔한 마음은 먹지마소

사랑 사랑 우리 사랑
잘되어도 우리 사랑

못되어도 우리 사랑
봄이 되어 꽃이 피고서

밤이 되어서 달 뜨면
님을 그려보나니

위대하다 우리 사랑
산과 같을까 바다와 같을까

사랑 사랑 우리 사랑
사랑 사랑 우리 사랑

우리 사랑 빛나도다
사랑 사랑 사랑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

1050년 5월 20일부터 29일가지 10일간에 걸쳐 일제 시대 부민관이 였던 국립극장에서는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인 현제명의'춘향전' 이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현제명은 일제 시대에 이미 연희전문에서 후일 한국 음악계의 중심이된 인물을 많이 길러 내었는가 하면 성악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해 레코드 취입등 인기있는 성악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무엇보다도 음악전문교육의 요성을 절감하고, 1945년 경성음악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했고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립되자 예술대학으로 흡수시켜 음악부장을 맡았는가 하면 다시 음악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초대학장으로 이 나라 전문 음악교육의 기틀을 세웠다.

해방후 춘향전을 대본으로 한 전5막의 오페라를 완성했고 서울대 음대 주최로 6.25전쟁 한달전에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지휘는 현 제명 자신이 맡았으며, 연출엔 유치진, 출연 가수는 당시 활동중 인 성악가들이 참가하였다. 대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했지만 음악의 흐름은 영악 선율을 따 르고 있어 한국적 내음이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들에 게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을 뿐만아니라 아리아나 사랑의 2중창은 유행가처럼 즐겨 부르기까지 해 반응은 대단하였다. 전문 작곡가가 아니어서 오페라 춘향전의 곡을 쓰는데 당시 정희 갑을 비롯한 당시 서울 음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었으며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 려해 생각한다면 대단한 성과이다.

줄거리

제1막 (광한루)
5월 단오날. 전라도 남원 땅. 단오날을 맞아 봄나들이 나온 이도령과 방자, 춘향과 향단의 만남 이 이루어진다. 한눈에 반한 이도령과 그네를 뛰는 춘향이 아름답 다.

제2막 (춘향의 집)
이도령이 춘향의 집을 방문해서 춘향모 월매와 나누는 노래, 춘향 과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는 그윽한 밤, 춘향과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이도령의 부친이 한양으로 갑자기 승급하여 전출하게 됨으로 됨으로 이도령과 춘향은 이별을 한다. 이도령은 변치 말고 기다리라며 거울을 징표로 건네주고 춘향은 반지를 이도령에게 주며 애절한 이별을 한다.

제3막 (동헌)
남원 땅에 새로 부임한 변사또는 일은 하지 아니하고 고을의 기생 들을 모이게 하여 일일이 점고 한다. 기생들이 마음에 안 들자 절세 미녀로 소문난 춘향이를 대령시킨다. 끌려온 춘향이 수청을 거절하자 분노한 변사또가 춘향에게 매 를 때리고 옥에 가둔다.

제4막 1장 (남원 가는 길)
춘향과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하여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 전라어사로 호명 받아 호남일대를 순시하던 중 남원관리 의 횡포소식을 접하고 변장을 하고 남원으로 향한다.

제4막 2장 (옥중 상봉)
이도령이 춘향집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들어서자 춘향어미 월매가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나타났다고 대성통곡. 옥에 갇혀 있는 춘향 이 꿈속에서 이도령을 만나 옥중가를 부른다. 이때 이도령이 거지 차림으로 월매와 함께 상봉하고 춘향은 사랑 이 변치 않음을 노래한다.

5막 (사또 생일잔치)
동헌에는 변사또의 생일잔치가 한창이고, 거지 행색의 이도령이 들어선다. 술 한잔에 시 한 수를 써주고 사라지는 이도령. 다시 생일 잔치가 절정에 이를 때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들어 선다. "암행어사 출도요" 결국 고을 일을 외면하고 놀기만 하던 부패관리인 변사또는 벌을 받게 되고 암행어사 이도령과 춘향은 재회의 기쁨과 더불어 온 고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 백년해로 한다.

현제명 玄濟明, 1902 경북 대구~1960. 4 서울.

작곡가·성악가. 기독교도로서 사업을 하던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에서 서양음악을 익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면서 서양선교사에게서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주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다가 숭실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레인보우레코드회사 사장인 R. 하버의 추천으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음악을 배웠다.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고향생각〉·〈산들바람〉 등의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음악부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고 공회당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지는 등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음반을 취입했다. 1932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유학가기 이전부터 박사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어느 글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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